파산 이후 카베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있었는데, 카자르자레궁은 잠깐 그의 마음에 난 구멍을 채워줬다. 그리고 동시에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희생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되었다. 그는 방향을 잃었고, 돈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조차 없는 현실에 발이 묶였다. 어렸을 때부터 허세를 부려왔던 카베는 동기나 친구들에게 가세가 기울어 용돈 정도의 돈밖에 남지 않았단 걸 알리길 원치 않았고, 하는 수 없이 그는 술집으로 가 술을 몇 병 시켰다. 술 한 병이 비워지고, 그는 테이블에 쓰러졌다. 그러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마음씨 좋은 술집 주인 람바드는 그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주고 공짜 술을 가져다주었다.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카베는 술집 2층의 별실을 디자인해줬다. 어쩌다 술집에서 아카데미아 학우들을 만나면 카베는 술을 마시며 영감을 찾는 척했고, 그렇게 술집에서 보름 가까이 지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또 한 번 이미 친구라 부를 수 없는 친구와 마주하게 되었다.
카베의 옛 친구 얘기에 지론파 출신 아카데미아 서기관 알하이탐이 빠질 수 없는데, 그는 동기에 비해 늦게 입학했음에도 성적이 매우 뛰어났다. 학생들은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있다는 것만 알 뿐, 그가 누구인지, 평소에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등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묘론파의 한 늙은 학자는 그에 관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나치게 총명해 남들과 어울릴 수 없는 천재」라고.
그때 당시 카베는 막 어머니와 이별한 직후라 홀로 고독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그 후배와 만나게 되었고, 호기심에 그에게 말을 건네 지론파의 천재 알하이탐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카베는 오지랖만으로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카베보다 두 살 어린 알하이탐은 풍부한 재능과 지혜를 지녔지만 성격, 출신, 학술 방면에서 추구하는 개념까지 모든 것이 그와 달랐다.
학창 시절은 카베에게 많은 추억을 남겼다. 그중 가장 최악의 기억은 단연코 그 공동 프로젝트였다. 한때 카베와 알하이탐은 서로의 재능을 인정하고 고대 건축물과 고대 룬 문자 및 언어학을 주제로 정해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카베는 알하이탐이 프로젝트 신청자가 될 것을 권했다. 처음엔 팀에 다른 학생들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뒤처졌다. 그때 카베는 처음으로 개인에게서 잔혹하고도 직관적인 재능 차이를 보게 됐다. 아카데미아는 재능에 따라 학술 자원을 분배했고, 사람들은 이를 통해 확실한 이치를 깨닫게 됐다. 알하이탐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이랬다. 「때론 재능이 상한선을 정하고, 노력이 하한선을 정하지. 일반인과 천재는 마지막엔 현실적인 요소에 의해 구분되니, 억지로 본인이 속하지 않은 그룹에 끼어들 필요는 없어」 그런데도 카베는 계속해서 주장했다. 그것은 단지 과정에 있는 장애물일 뿐이지 결과가 아니며, 지혜는 많은 사람이 함께 발굴해야 하는 것이라고. 다른 학생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카베는 제 시간과 공을 들여 그들의 일을 도맡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었다. 알하이탐은 그와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카베가 지나치게 이상만을 좇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술은 자선활동이 아니며, 짧은 구호 활동으로 현실을 바꿀 순 없다는 말도 내뱉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그러다 결국 팀엔 카베와 알하이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는데,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둘은 결국 폭발했다. 카베는 알하이탐이 지나치게 이기적이라 말하며, 분명 더 많은 사람을 돕고 더 많은 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알하이탐은 카베의 비현실적인 이상주의는 현실에 대한 도피라고, 그리고 언젠간 살아가는 데 있어 짐이 될 것임을 지적하며 이는 단순히 카베의 마음속 피할 수 없는 죄책감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그것은 가장 친한 친구가 날린 일침이었다. 알하이탐은 그간 카베가 직시하지 못했던 현실을 일침했고, 카베는 처음으로 현실에서 아픈 곳을 찔리고 말았다. 그는 이 지나치게 총명한 사람과 친구가 된 것을 후회한다고 선언했다.
팀은 와해됐다. 알하이탐은 과감하게 논문의 서명을 그어버렸고, 화가 난 카베도 논문 초고를 찢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후회하며 다시 주워다 붙였지만. 그는 친구를 바꿀 수 없으며, 친구 또한 자신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다.
후에 두 사람은 학술 간행물을 통해 몇 차례 의견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의 공동 프로젝트였던 《적왕 문명 유적의 고대 룬 문자 및 건물 설계 방향 해독》이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해당 프로젝트의 언어학적 성과는 일부 고대 언어에 빠져있던 문법 규칙을 채웠고, 그 덕분에 고대 서적의 해독이 가능해졌다. 또한 해당 프로젝트의 건축학적 성과는 수메르의 일부 특수 지형의 가옥 하중 구조를 개선해 오지 주민들의 삶이 한층 나아졌다. 아카데미아 측은 프로젝트를 위한 연구 장소를 마련해 줬지만, 아쉽게도 일손이 부족한 데다 주요 연구자들의 마음이 맞지 않아… 결국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실패한 프로젝트는 카베 인생에 피할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훗날, 여러 차례 현실의 벽에 부딪힌 카베는 결국 인정했다. 혼자만의 생각과 소망이 항상 유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는 과거 친구가 했던 말의 참뜻을 이해했다. 아무것도 없이 공중 화원에 가려는 이는 결국 공중에서 헛발을 디뎌 떨어져 죽게 된다. 천재면서도 카베는 그룹을 원했고, 남들과 멀어질까 봐 두려워했다. 그와 알하이탐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술집의 테이블로 생각이 돌아왔다. 몇 년이 지났을까, 카베는 술을 사러 온 알하이탐과의 우연한 만남에 놀랐다. 알하이탐은 한눈에 그의 현재 상황이 좋지 못하단 것을 알아챘다. 오랫동안 삶에 짓눌렸던 카베가 모든 스트레스를 쏟아냈다. 문제를 감출 수도 없으니, 유일하게 관계가 깨져버린 친구 앞에서 가면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는 수많은 불만을 입에 담았다. 늦은 밤 술집에서 나와 한때 자신의 집이었던 그 건물을 보고 나서야 조잘거리던 입을 멈췄다. 알하이탐은 그의 이야기를 듣곤 다시 한번 카베란 사람을 꿰뚫어 봤다. 그리곤 그에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네 이상은 어떻게 되어가지?」
학자에게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현실뿐이지만, 카베는 무엇이 진짜 현실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이상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며, 잘못된 건 자신의 수단이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포기하면 안 된다.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 행하는 선이라고 해도 결국 누군가에겐 의미가 있는 행동이다. 이상 속 꿈의 나라에 도달하진 못하더라도 그것이 반짝이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환상 같은 현실 또한 존재한다. 갈 곳 없는 그가 어찌어찌 옛 친구의 집에 머물게 됐으며, 서기관 앞으로 된 그 집이 둘의 프로젝트의 보상으로 아카데미아에서 준 보상이라든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만약 카베가 포기했더라면 학술 자원도 합법적으로 집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또 알하이탐이 조건 없이 선행을 베푸는 이가 아니란 것을 잘 아는 카베가 스스로 죄책감을 느껴 먼저 집안일을 한다고 나섰다가 잡일까지 맡게 된 일… 등등도 있다. 이것으로 증명되었다: 바꿀 수 없는 친구야말로 삶에서 변하지 않는 과거이며, 이성과 감성, 언어와 건축, 지식과 우정… 한데 뒤섞이지 않는 것들이 거울의 앞뒷면 내지 세상 전체를 구성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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