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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시대의 어느 떠돌이 학자가 우림, 사막, 도시를 여행하며 수집하고 정리한 이야기집. 원작에 담긴 이야기는 무궁무진했으나, 지금은 일부 단편만 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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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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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시대의 어느 떠돌이 학자가 우림, 사막, 도시를 여행하며 수집하고 정리한 이야기집. 원작에 담긴 이야기는 무궁무진했으나, 지금은 일부 단편만 남았다고 한다

3.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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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보기

그림자 없는 자의 이야기

 

먼 옛날 대륙엔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소박한 삶을 살았고, 사는 곳 외의 세상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잃은 모험가가 그들을 발견했다. 그림자 없는 자들은 모험가의 발걸음을 묵묵하게 따르는 과묵하고 충성스러운 추종자를 신기하게 여겼다. 모험가 역시 태양 아래 그림자가 없는 민족이 대륙에 실존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이런 발견을 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모험가는 말했다.
「꿈? 우리는 꿈을 꾸지 못 하게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어르신들은 모든 꿈을 꿔봤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림자에는 영혼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그림자가 없으니 꿈을 꾸지 않는 겁니다.」 모험가는 말했다. 「예전엔 그림자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신들은 예전에는 꿈을 꿨었으니까요.」
「그럼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전 어디로 가야 합니까?」
「밀림으로 가세요. 그곳엔 꿈이 많으니, 꿈 사냥꾼이 남는 꿈을 당신에게 줄지도 모르죠.」
그림자 없는 청년은 고향을 뒤로하고 모험가가 말한 밀림으로 먼 길을 떠났다. 밀림 속에는 무수한 그림자가 있었다. 구름의 그림자, 나무의 그림자, 심지어 보잘것없는 새조차 부드러운 땅에 거대한 그림자를 남겼다.
하루, 또 하루. 그는 겹겹이 쌓인 그림자 사이를 매일같이 헤맸다. 그림자에는 영혼의 비밀이 숨어있다고 했다, 그러나 수많은 비밀 중에 비밀을 가지지 못한 자는 그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알게 됐다, 모든 꿈이 그에게 열려있다는 것을. 그에겐 자신만의 꿈이 없었지만 그래서 타인의 꿈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겪은 수많은 꿈 중 새의 꿈은 선명한 색을 띠었고 호랑이의 꿈은 달콤했지만, 꿈 사냥꾼이나 남는 꿈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존재에겐 꿈과 그림자가 각각 하나씩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어쩌면 모험가가 자신을 속인 걸지도 모른다, 주인 없는 꿈이나 주인 없는 그림자 같은 건 애초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실패를 거의 받아들일 무렵, 꿈 사냥꾼이 그를 찾아왔다. 만남은 소라의 꿈에서 이뤄졌다. 그는 하얀 파도와 소금 바람을 찾으려 했지만, 종장의 순간에 끼어든 것이기에 슬픈 여운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너도 이 소라처럼 밀림에 속하지 않았구나.」
목소리의 주인은 한 여성이었다. 그는 그녀가 모험가가 말한 꿈 사냥꾼이란 걸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는 보석을 가득 엮은 커튼처럼, 기이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그는 말했다. 「혹시 남는 꿈이 있나요…」
「그건 아침 이슬처럼 쉽게 사라지는 것이야…」 꿈 사냥꾼의 말에서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 없는 꿈은 오래 보관할 수 없어. 많은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엔 흩어져버리더군.」
「…봐봐, 이 소라와도 같아… 우리도 떠나야겠네.」 꿈 사냥꾼은 그의 손을 잡고 하얀 파도와 소금 바람이 지나간, 곧 사라질 꿈을 떠났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옆에서, 그녀는 그에게 많은 이야기와 타인의 꿈에 들어가는 요령을 알려줬다. 그 후엔 그에게 꿈 사냥꾼의 금기를 재차 경고했다. 예를 들어 타인의 비밀은 바닥없는 우물과도 같기에, 타인의 꿈을 돌아봐선 안 된다고 말이다.
「악몽은 네 생각보다 훨씬 교활해. 너라는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벌떼처럼 몰려와 빛이 없는 경계로 끌고 갈 거야, 그림자가 없는 그곳에선 빠져나오기 힘들 테지. 그곳에서 충분히 오래 머물다 보면 그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서 유의미한 단어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될 텐데, 그건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을 맴도는 오래된 이름들이지. 기억해, 망자의 이름을 절대 꺼내선 안 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너를 찾아올 거야….」
「전 당신들도 그림자가 없는 줄 알았어요.」 그는 솔직하게 물었다. 「꿈 사냥꾼도 자신의 꿈이 없어서, 타인의 꿈을 수집한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알록달록한 그림자가 풀잎처럼 저녁 바람을 따라 흔들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림자 없는 청년은 답이 너무 알고 싶었고, 꿈 사냥꾼이 그림자를 잘 지켰음에도 기회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밀림을 떠도는 여느 생명체들과 달리, 꿈 사냥꾼의 꿈으로 향하는 길은 좁고 험했다.
역시,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타인의 꿈속에 숨겨뒀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것은 누구의 꿈일까?
꿈 사냥꾼의 꿈은 밀림처럼 복잡했기에 그는 이내 방향을 잃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악몽에 거의 따라잡히고 말았다.
「나는 꿈 사냥꾼의 금기를 어겼어, 바닥없는 우물을 응시하더라도 답을 찾아낼 수 없겠지.」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충분히 오래 있으면 그들의 소리에서 이름을 분별하게 될 거라 했어. 그러면 최소한 이게 누구의 꿈인지는 알 수 있겠지.」
그는 악몽이 그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게 내버려 뒀다. 그곳은 그녀가 경고했던 것처럼 무한한 빛이 없는 경계였다. 그는 작은 속삭임에 집중했다, 그 안에서 이름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조각난 소리를 조합해 이름 하나를 알아냈다. 그것에는 특별한 힘이라도 있는 듯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읊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떴다.
「기이한 풍경을 봤어요.」 그는 말했다. 「어느 여자가 제 꿈에 들어와 제 꿈을, 제가 알지 못했던 영혼의 비밀을 훔쳐 갔어요. 그래서 저는 그림자가 없어졌죠. 그녀가 저를 이렇게 부르더군요, 그녀는…」
「알지?」 그녀는 그의 말을 끊었다. 「망자의 이름을 절대 꺼내선 안 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너를 찾아갈 거야….」
꿈 사냥꾼은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있었고, 알록달록한 그림자는 풀잎처럼 저녁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그건 어느 죽은 자의 이야기야. 내가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지만, 아직 안 들려준 이야기가 더 많아.」
그렇게 꿈 사냥꾼은 그림자 없는 청년에게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제2권 보기

다스터의 이야기

 

옛날, 바후마나 학부 출신의 다스터가 있었다. 홀로 사막의 깊은 곳을 가거나 고대 국가의 유적을 조사하기도 했던 그는 불행하게도 모래폭풍을 만나 사막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의 생명이 꺼져가던 찰나,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인이 나타나 지팡이로 모래폭풍을 가르고 그가 사막을 빠져나올 수 있게 했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정오가 된 후였다. 그녀는 집에서 그에게 점심을 대접했고, 오후에 카라반 수도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젊은 마법사가 모래바람을 가르고 그 칠흑의 짐승 무리를 몰아내는 광경을 목격한 다스터는 떠나길 거부하며, 그녀를 스승으로 모시고 고대의 비법을 전수받기를 원했다.

 

마법사는 말했다. 자신의 호박색 눈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본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다고. 그림자가 없는 자, 상상에 기대 울리는 구리종, 육지를 떠난 적 없는 고래, 은거울에 비친 달빛 아래에만 존재하는 도시, 영원에 갇힌 학자, 그리고 일곱 현에 매달린 고탑까지. 그녀는 그에게서 무한한 재능과 원대한 미래를 보았기에 자신의 모든 지식을 알려줄 의향이 있노라 말하면서도, 그가 모든 것을 배운 후엔 그녀를 배신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다스터는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신발에 입을 맞추며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며, 죽더라도 함께 죽겠다고. 그의 정성에 젊은 마법사는 감동했고,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일으킨 뒤 그의 손을 잡고 지하실 문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곤, 그를 자신의 제자로 삼을 것이며, 자신이 아는 모든 비밀은 이 지하의 서고에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나선 계단을 따라 한 층, 또 한 층 내려갔다. 각 층의 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었고, 거울은 횃불의 불빛과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쩌면 몇 시간일지도, 몇 분일지도 모르겠다. 어둠은 시간 감각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계단의 끝엔 좁은 문이 있었는데, 문 뒤로는 육각형의 서재가 펼쳐졌다.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이곳의 서적은 지식에 대한 그의 모든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마법사의 지도 아래 그는 순조롭게 배움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났을 무렵, 침묵의 신전의 사자가 다스터를 찾아왔다. 사자는 그의 지도 교수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이전에 제출한 논문은 통과됐으니 아카데미아는 그를 허배드로 임명해 지도 교수의 뒤를 이어 학생들을 육성하게 하기로 정했음을 알렸다. 허배드가 된 건 매우 기뻤지만, 이곳을 떠나긴 아쉬웠기에 그는 조심스레 마법사에게 물었다. 스승님께서 일부 서적을 챙겨 저와 함께 아카데미아로 가 계속 가르침을 주시면 안 되겠냐고. 젊은 마법사는 요청에 승낙했다. 다만 자신에겐 여동생이 있는데 줄곧 아카데미아에 가고 싶어 했으나, 사막 출신이란 이유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며, 그런 그녀를 청강생으로 받아줄 것을 청했다. 이에 허배드는 아카데미아는 입학 규칙이 엄격하므로 예외를 둘 수 없으며, 청강생조차도 안 된다고 거절했다. 마법사는 더 말하지 않고 간단하게 짐을 싸 그와 함께 수메르로 갔다.

 

몇 년 후, 바후마나 학부의 현자가 세상을 떠났다. 마법사의 도움으로 완성한, 세상을 놀라게 한 불세출의 여러 논문 덕에 허배드는 후임 현자로 추천됐다. 마법사는 그를 축하하며 그가 현자의 신분으로 자신의 여동생을 청강생으로 삼아주길 청했지만 새로운 현자가 된 그는 이를 거절했다. 자신이 그럴 의무가 없을뿐더러, 더는 논문을 쓸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녀의 지도 또한 필요 없어졌다고 말하며 그녀더러 마을로 돌아가 편히 쉬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법사는 더 말하지 않고 간단히 짐을 싸 사막으로 돌아갔다.

 

다시 몇 년이 흐르고, 대현자가 서거하자 바후마나 학부의 현자가 신임 대현자로 선출됐다. 그 소식을 들은 마법사는 사막에서 달려와 대현자의 앞에서 바닥에 엎드린 채 그의 신발에 입을 맞추며 자신과의 약속을 기억하느냐고, 모래폭풍으로 갈 곳을 잃은 동족들이 우림으로 피난할 수 있게 받아달라고 말했다. 대현자는 크게 화를 내며 그녀를 청동 감옥에 가둬 굶겨 죽이겠다고 했다. 자신은 사막에서 온 거짓말쟁이 따윈 모르는데, 감히 헛소리로 아카데미아를 협박하냐면서 말이다. 더는 젊지 않은 마법사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두 뺨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탁해진 호박색 눈으로 대현자를 바라보며 은혜를 베풀어 동족들을 구할 수 있게 자신을 마을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대현자는 거절했고, 경비병을 불러 그녀를 결박했다. 젊은 마법사는 다른 말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이만 마을로 돌아가 주세요.」

 

대현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는데, 그는 카라반 수도원 앞에 있었다. 밤은 깊었고, 멀리 촌락은 흩날리는 모래와 어둠에 뒤덮여 흐릿한 형상만 보였다. 젊은 여인은 그에게 빙그레 웃었다. 호박색 눈에는 그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아직 논문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바후마나 학부에서 온 다스터 말이다.

 

「자, 많이 늦었으니 이제 아카데미아로 돌아가셔야죠. 이야기 속에서 말했던 것처럼요…」

제3권 보기

왕자와 동물 짐꾼의 이야기

 

아주 먼 옛날 오르모스 항구가 아직 바다를 누비는 데이들에게 통치받던 시절, 무수한 섬과 비경을 정복해 수많은 보물을 손에 넣고 오르모스 항구 제일의 부호가 된 용감한 데이가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망망대해를 누비고 뒤늦게서야 외아들을 얻은 탓에, 데이는 왕자가 성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린 왕자는 데이가 남긴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그에겐 아버지의 사람들을 통솔할 힘도, 그를 이끌어줄 덕망 높은 어른도 없어 이내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 오르모스 항구의 번화한 거리는 돈 먹는 짐승과 같아서, 데이의 유산은 겨우 몇 년 만에 왕자의 손에 거덜 났고, 더 나아가 큰 빚까지 지게 된다. 왕자가 정신을 차렸을 땐 집안 어느 구석에서도 모라 하나 찾을 수 없게 된 후였고, 집과 노예를 모두 잃은 후 갈 곳이 없어진 왕자는 어쩔 수 없이 도시의 사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선원을 보우하는 고대의 신이 모셔져 있었는데, 왕자의 아버지가 바친 공물로 오늘날의 장엄한 모습을 갖추게 된 곳이었다.
왕자는 사당의 제사장에게 청했다. 「지혜로운 장로님. 저는 원래 칠해를 정복한 데이의 아들이었으나, 무절제한 행실로 지금 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제가 빚을 갚고 재산을 되찾기 위한 길을 인도해주십시오. 맹세컨대 오늘부터 과거를 뉘우치고 본분을 지키는 삶을 살겠습니다.」
「젊은 왕자님.」 제사장이 말했다. 「인간의 운명은 신께서 정하시지만, 인간 스스로의 행동에 달려있기도 합니다. 한데 어찌 과거를 뉘우치기로 했음에도 지금부터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아닌, 요령을 찾으려고 하십니까?」
왕자는 투덜거렸다. 「내 아버지가 사당에 바친 게 얼만데, 그렇게 따지면 이 금칠한 신상들과 당신들이 쓰는 물건의 절반은 다 내 것이나 다름없지. 오늘 난 그 빚을 돌려받아야겠어!」
「오만한 왕자시여, 어찌 신과 거래하려 합니까?」 제사장은 탄식했다.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를 생각해, 당신이 오늘부터라도 본분을 지키고 열심히 살겠다 약속하시면, 다시 부유해질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왕자는 신상을 향해 맹세했고, 제사장은 그에게 외항의 시가지로 가라 말했다. 왕자가 시장에 오니, 아름다운 옷차림에 여인이 비쩍 마른 동물 짐꾼을 지키고 있었다.
왕자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고귀하신 부인,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마침 잘 오셨어요.」 부인은 대답했다. 「급한 일이 있어 멀리 바다로 나가야 하는데, 이 짐승을 돌볼 사람이 없어 고민이었답니다. 만약 삼 개월 동안 이 녀석을 돌봐주신다면 보답으로 천만 모라를 드리지요.」
이 말을 들은 왕자는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부인은 말을 이어갔다. 「이 짐승을 배불리 먹이거나 말을 걸어선 절대 안 됩니다. 이 말에 따르지 않을 경우, 당신은 지금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 겁니다.」
「내가 더 잃을 것이 있나?」 그렇게 생각한 왕자는 흔쾌히 승낙했고, 부인은 동물 짐꾼을 그에게 맡겼다. 삼 개월은 짧은 시간이었고, 왕자는 부인의 분부대로 동물 짐꾼을 배불리 먹이지도, 그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마지막 날 밤까지는.
그날 밤, 왕자는 모닥불 앞에 앉아 보수를 받고 보내게 될 삶을 상상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동물 짐꾼에게 말했다. 「동물 짐꾼아 동물 짐꾼아, 네 덕에 내가 다시 부자가 됐구나.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내가 다 들어주마.」
그 말을 들은 동물 짐꾼이 눈물을 흘렸다. 「존경하는 왕자님,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마지막 날 제게 밥 한 끼만 주신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동물 짐꾼이 말을 하자 왕자는 깜짝 놀랐다. 호기심이 생긴 그는 부인의 당부를 뒷전으로 하고 울타리에서 수초를 가져왔다.
「선량한 왕자님.」 배불리 먹은 동물 짐꾼이 여유롭게 말했다. 「저는 원래 신을 모시며 모래바다의 여러 속국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만 그 악독한 마녀에게 속아 이런 모습이 되고 말았죠. 이제 당신이 은혜를 베풀어 저를 모래바다에 풀어주시면, 작열하는 왕에게 맹세컨대 그 마녀가 당신에게 주기로 한 것보다 훨씬 많은, 무궁한 재물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동물 짐꾼의 말을 반신반의한 왕자는 우선 동물 짐꾼을 숨긴 채 자신도 구석에 숨어 부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날, 부인은 약속한 시각에 맞춰 시장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 왕자와 동물 짐꾼은 없었다.
「이 배은망덕한 거지놈!」 부인은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잡히기만 해봐. 반드시 가장 작은 요술병에 넣어 영원히 고통받게 할 테다!」
그런 귀부인의 모습을 본 왕자는 동물 짐꾼의 말을 믿게 되었다. 부인이 돌아간 후, 그는 동물 짐꾼을 놓아줄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 동물 짐꾼은 그에게 말했다. 「인자하신 왕자님, 당신에게 사막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도 약속대로 막대한 부와 무한한 행복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주의해 주세요. 절대 그 부와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 알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다 잃게 될 겁니다」
동물 짐꾼이 알려준 대로 왕자는 사막 변경의 어느 은밀한 장소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높고 화려한 궁전이 있었는데, 궁전의 성벽은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순금의 대문 앞에는 미려한 시종이 구름 같은 여인들을 이끌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왕자는 다시 주색에 빠진 방탕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시종은 매일 무수한 금은보화와 산해진미를 가져왔고, 이를 대접하는 악사와 무용수도 매일 달랐다. 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
그 어떤 쾌락과 향락도 결국 질리기 마련이다. 수일 만의 술에서 깨어난 어느 날, 왕자는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생활도 지루하구나,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겠어. 그때 그 요녀의 말을 듣지 않아 지금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됐지. 자칭 번왕이라는 그 동물 짐꾼도 분명 어떤 비밀을 들킬까 봐 나한테 뭔가를 숨긴 걸 거야, 만약 내가 이 무궁한 재물의 출처를 알아내면, 분명 더 큰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왕자는 충복을 불러 물었다. 「내 충실한 하인아, 나에게 매일 가져오는 금은보화와 산해진미, 그리고 이 악사와 무용수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려줄 수 있느냐?」
「물론입니다. 존경하는 주인님.」 시종은 답했다. 「전 매일 사막과 궁전을 오갑니다. 당신이 쓰시는 모든 것은 모래바다에서 나왔지요. 아름다운 무용수는 뒤뚱거리는 사막 뱀장어요, 눈부신 황금은 사막에 넘치는 모래이며, 산해진미는 모두 제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저, 당신의 충복은.」 시종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저 비천한 한 마리의 황금 스카라브일 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휘황찬란하던 궁전은 삽시간에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주위에는 벌레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어느 낮은 모래 언덕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비로소 정신을 차린 왕자는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여 막심한 후회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 왕자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고 더 이상의 즐거움도 없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제4권 보기

학자의 이야기

 

오래 전 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보통 글 좀 배웠다 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고고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비록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그는 결코 뛰어난 학자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학문은 마치 과일과도 같다. 시간은 빠르게 과일의 신선도를 빼앗아 간다. 과즙이 풍성할 때 그것을 먹어 치울 수 없다면 남은 건 냄새나는 썩은 과일뿐이다.
「시간은 나의 적이다.」 젊은 학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동료들보다 훨씬 더 짜증 나는 자식이지.」
하지만 게으른 천성은 절대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짜증 나는 동료」들이 수많은 경력을 쌓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동안 학자에게 남은 건 세월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소원을 이룰 기회를 얻게 된다.
「시간은 공평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 내 머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돌아가지 않는 건 절대 내 재능이 떨어져서가 아니야. 시간이 나한테만 유난히 엄격해서라고…」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 학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이런 기회가 생겼으니 무조건 잘 이용해야겠어.」
그래서 학자는 지니에게 이런 소원을 빌었다: 「저는 공평한 시련을 원합니다… 제가 더 좋은 논문을 쓸 수 있도록 말이죠.」
지니는 바로 학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야.」 지니가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전 이미 그 대가 중 일부를 치렀습니다.」 학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 아무 의미도 없는 추격전에 젊은 시절을 허비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전 더 이상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 따위는 바라지 않습니다. 전 그저 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저작을 남겨 제 이름이 세세 대대로 칭송받길 원할 뿐입니다. 언젠가 부식될 종이 위에 남아 사라지는 먹이 아닌 바위에 새겨지고 싶습니다.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제 흔적이 남을 수 있게요. 공정함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시간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원한다면…」 지니는 별말 없이 학자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그것이 정말 지니였는지 아니면 지니의 탈을 쓴 악마였는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지금은 그것을 의논할 때가 아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소원을 이룬 학자는 놀랍게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다.
「좋아. 아주 좋아. 이제 나보다 머리가 더 빨리 돌아가는 사람은 없어.」 소원을 이룬 학자는 꽤 만족스러웠다. 학문을 깊이 생각할 만한 충분한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모래시계의 모래 한 알이 떨어지는 순간, 손을 들어 이마를 만질 수도 없는 그 찰나의 순간에 학자는 마음껏 생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밀림에서 사막으로, 황야에서 설원으로… 학자의 생각은 책을 따라 끝없이 펼쳐졌다. 책장을 펼치는 시간이 아까워 책의 모든 내용을 큰 종이 한 장에 적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그의 눈동자는 결코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단어 하나에 닿는 순간, 학자는 이 단어와 관련된 모든 어휘와 모든 상상력을 다 쏟아냈으니까.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쓰지 않는 건 의미가 없어.」 얼마 후, 학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화려한 단어로 이 완벽한 논리를 기록해야겠어.」 하지만 학자가 첫 글자를 쓴 순간, 그의 생각은 이미 문장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학자는 자신이 발표하려는 문장을 수없이 되뇌었고 반복적인 과정을 거쳐 그 문장은 점점 더 완벽해져 갔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그의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졌을 뿐, 그가 드디어 역작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오른손은 이제 겨우 일곱 번째 글자를 쓰고 있었다.
학자의 몸은 가장 화려한 단어로 가장 완벽한 논리를 입증했어야 할 논문을 써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가 써낸 작품은 책을 갈기갈기 찢어 아무렇게나 흩뿌려놓은 듯했다. 무작위로 적혀진 조각난 글들을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날은 별 하나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겨우 서재에서 정원으로 나온 것뿐이었지만 학자는 백 년 동안의 원정을 끝낸 듯 지쳐버리고 말았다.
「글로 쓰는 것보다 차라리 말로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더 직접적이니까.」 학자는 여전히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발성기관도 학자의 뛰어난 사고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마디를 채 끝내기 전에 그의 생각은 또 다른 곳으로 넘어가 버렸고 결국 학자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흐느낌 같은 중얼거림뿐이었다.
「불쌍한 사람! 악마에 씐 걸까?」 화려한 옷차림의 청년 남녀가 학자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래도 달빛만은 저 사람의 곁을 지켜주니 다행이네.」
두 사람은 그 말만을 남긴 채 자리를 떠버렸고 달빛이 비치는 정원에는 학자만이 덩그러니 남고 말았다. 육체라는 굴레에 갇힌 그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읽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되돌이켜 볼 뿐…

제5권 보기

거울, 궁전과 꿈을 꾸는 자에 관한 이야기

 

여인은 매일 밤 머나먼 궁전에 관한 꿈을 꾸었다. 수많은 코너와 아케이드 그리고 복도가 이 복잡한 건축물을 이루고 있었다. 모든 복도의 끝에는 금테를 두른 은거울이 걸려있었다. 듣기론 국왕은 200년(당시의 역법으로 계산하면 여기에 6년을 더해야 했다)을 들여 이 궁전을 설계했으며 왕좌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면 정교하게 기획된 구불구불한 빛의 길을 따라 왕국의 곳곳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꿈속에서 그녀가 복도 끝에 걸린 거울 앞에 선 순간,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흐릿한 자신의 그림자뿐이었다. 화려한 옷차림에 가면을 쓴 여인이 아름다운 복도를 지나는 모습은 환한 대낮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더 반짝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국왕을 알현해 그에게 무언가를 알려줘야 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성으로 누를 수 없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순간, 결국 내뱉지 못한 그 말은 꿈에서 봤던 거울 속으로 아련하게 사라지곤 했다.
1년이 흐르고, 2년이 흐르고 여인은 매일 똑같은 꿈을 꾸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왕좌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했고 국왕을 직접 만날 수도 없었다. 거울 속에 비쳤던 소녀는 어느새 세상에 이름을 떨친 유명한 마법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짧은 꿈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의미 없는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환상 같은 그녀의 의지는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머나먼 그 나라에 관한 단서를 찾게 되었다. 마법사는 모두 부러워하는 명예를 버리고 혼자 여행길에 나섰다. 은은한 달빛을 넘어, 어두운 골짜기를 넘어, 도착한 칠흑 같은 밀림의 깊은 곳에서 그녀는 드디어 꿈속의 그 왕국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국은 이미 몇백 년 전, 화재로 전부 불타버린 상태, 과거 화려했던 왕국은 이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시에서 말한 것처럼 말이다.

 

사라진 아침 바람은 이미 잊히고,
하늘은 결국 노을과 노랫소리를 전부 집어삼켰네.
남은 것이라곤 탑 꼭대기에서 반짝이는 미약한 불빛뿐,
그 불빛만이 황량한 성의 긴 밤을 지켜주는구나.

 

그녀는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담벽들 사이에서 발견한 금테 은거울은 이미 산산이 조각난 상태고 그 조각은 먼지 더미 속에 흩어져있었다. 차가운 달빛이 거울 조각에 반사되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궁전은 그녀가 꿈속에서 봤던 것처럼 크지도, 괴이하지도 않았다. 코너를 몇 번 돌고, 복도 몇 개를 지나고… 여인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왕좌가 있는 방의 대문을 열었다. 그것은 고리 모양의 대청, 수백 개의 거울이 돌로 만들어진 벽 위에 걸려있었다. 복도에서 봤던 거울과 마찬가지로 그중 대부분은 이미 파괴된 상태, 하지만 마법사는 천천히 수백 년 동안 텅 비어있던 왕좌를 향해 걸어갔다. 왕좌에 앉은 마법사는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화려한 옷차림에 가면을 쓴 여인이 아름다운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파괴된 거울은 그런 여인의 일천 개의 그림자를 담아내고 있었다.
흠칫 놀란 마법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면을 쓴 젊은 여인이 바로 그녀 앞에 선 채 조용히 마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눈빛은 그녀가 짐작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슬픔이 담겨있었다. 마법사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여인이 비수를 그녀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장미처럼 붉은 피가 날카로운 칼날을 따라 천천히 퍼져나갔다. 이때 주위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몇백 년 전 전소된 왕궁을 다시 잠식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 놀라움, 안도감 등 온갖 표정들이 전부 담겨있었다. 싱긋 미소 짓던 여인이 가면을 벗었다. 가면 아래에는 마법사와 똑같은 얼굴이 숨어있었다. 바싹 마른 여인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마법사는 여인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수십, 수백 년을 넘어 이제는 아련한 꿈이 되어 태양과 함께 사라진 말들… 그 이야기는 수천, 수만 개의 거울 조각에 반사되어 영원한 메아리를 이루고 있었다…

제6권 보기

새 사냥꾼의 이야기

 

이것은 늙은 새 사냥꾼에 관한 이야기다.
왕국의 북쪽에는 밀림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학설조라는 새가 살고 있었다. 학설조는 아름다운 깃털을 가지고 있어 아침햇살을 받을 때면 마치 무지개처럼 반짝였다. 그들은 높은 나무 사이를 누비며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그리고 이 밀림에는 노인도 한 명 살고 있었다. 검은 피부, 남루한 옷차림. 마치 야인과 같은 행색의 노인은 학설조를 잡고 싶었다.
하늘을 찌르는 나무에게도 작은 묘목이었던 시절이 있듯이 노인도 한때는 젊고 잘생긴 소년이었다. 그는 밀림 주위의 마을에서 나고 자랐는데 날렵한 몸놀림과 착한 마음씨로 마을 사람들 모두 그를 좋아했다. 당시 마을의 여자들 중 소년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소년은 일편단심 자신의 연인만 바라보았다. 소년의 연인은 숲의 사제였다. 소녀는 숲의 사랑을 받는 여인으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이었다. 소년이 소녀에게 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이 생이 끝나는 날까지 소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행복한 삶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왕국은 기나긴 전쟁을 시작했고 모든 청년들은 병사로 징집되었다. 소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고향을 떠나 전장에서 왕국을 위해 싸워야 했다. 떠나기 전날, 소녀는 처음 소년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푸른 잎사귀에 맺힌 이슬처럼 맑은 눈물이 소년의 가슴을 적셨다. 하지만 아직 어렸던 소년은 소녀가 곧 다가올 이별 때문에 운다고 생각했을 뿐, 그 눈물에 담긴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소년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녀와 미래를 약속했다. 이렇게라도 소녀의 슬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의 약속에도 소녀의 슬픈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한참 침묵하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부터 학설조를 길들이겠다고. 저 새들을 소년의 곁으로 보내 먼 타향에서도 사랑하는 연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조금 의아했지만 소녀가 그의 마음을 잡기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소년은 마을을 떠나 왕국의 병사가 되었다. 바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전쟁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소년의 턱에는 수염이 자라고 순수했던 눈동자도 날카롭게 변하고 항상 무기를 들고 있던 손에 두터운 굳은살이 생길 때쯤에야 기나긴 전쟁은 종료를 선포했다.
이 잔인한 전쟁 속에서 소년에게 유일하게 위로를 전해주는 건 바로 고향에서 날아온 학설조였다. 학설조는 정말 신의 도움이라도 받은 듯 어둡고 조용한 밤에도 그를 찾아내 소년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소년은 학설조를 통해 마을에서 일어난 변화나, 그를 위해 쓴 사랑의 시와 같은 달콤한 그리움의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기나긴 이별에도 소녀에 대한 소년의 사랑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치 튼튼한 비석처럼 더 두텁고 단단해졌다.
전쟁이 끝나자 소년은 부랴부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소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서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소년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는 병에 걸려 차가운 시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바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학설조는 소년에게 소녀의 말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정원으로 쳐들어가 굳게 닫힌 소녀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 순간, 마법의 힘을 받아 깊은 잠에 들었던 학설조들이 문틈으로 들어온 햇살에 눈을 번쩍 떴다. 잠에서 깬 학설조들은 날개를 펄럭이더니 소년의 몸 옆, 귓가를 스치며 멀리 날아갔다. 소년이 정신을 차렸을 때 학설조들은 마치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멀리 밀림으로 다시 돌아간 뒤였다. 소년의 눈앞에 펼쳐진 건 텅 빈 방뿐이었다.
그제야 그는 왜 소녀가 그날 밤 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었는지 왜 학설조를 보내겠다는 이상한 약속을 했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방금 전 그가 문을 연 탓에 도망친 학설조들은 소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소년은 마지막 순간까지 소년을 위한 사랑의 말들을 준비했던 것이다.
새의 수명은 인간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길었다. 그 뒤로 소년은 숲에 날아든 학설조를 쫓기 시작했다. 새의 울음소리에 깃든 소녀의 영혼을 쫓아 연인에 대한 미안함을 속죄하고 싶었다. 하루가 흐르고, 이틀이 흐르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학설조만을 쫓는 소년은 마치 미치광이와도 같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소년은 중년 남자가 되었고 또 노인이 되었다. 비록 이 밀림에 갇힌 신세가 되었지만 소녀의 말을 기억하는 학설조는 점점 더 줄어들었지만 그가 아직 듣지 못한 말이 하나라도 있지 않을까라는 집념에 새 사냥꾼은 밀림을 떠날 수 없었다.
노인은 익숙한 손길로 학설조를 유인해 새장 안에 넣은 뒤 부드러운 손길로 학설조의 목을 쓰다듬고 최고의 곡식과 가장 맑은 물을 먹였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곤 했다. 말해보렴, 말해보렴. 학설조들아, 나의 연인, 숲의 사랑을 받던 그 아이가 너희들에게 어떤 말을 가르쳐주었니?
노인이 이렇게 질문하면 배불리 먹고 마신 학설조들은 가끔씩 이런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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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게시자: 너나우리 / 5분 전 / 댓글: 0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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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un39

    동일하게 원하는게 안나오는 정확성ㅠㅠ
    2021.03.10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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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게시자: 가나다라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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